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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范蠡庙之由来)범려사당의 유래

浏览:10次    发布日期:2022-06-14

 범려사당의 유래

 

   범려, 자는 소백이고 춘추시대 말기의 정치가이자 군사이며 지략가에 경제학자 또 도가학자로서 월왕 구천을 도와 월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데 공헌한다. 월나라를 부흥시키고 오국을 멸한 후 사라진다. 범려는 월국을 떠난 후 놀랍게도 세 번의 거처를 옮겨 생활했고, 세 번 큰 재물을 모았으며 또 세 번을 가난한 백성들을 위해 재물을 나누어 주었기에 그를 중국 고대의 대 자선가라고 부를만 하다. 후대 수많은 장사꾼들이 그의 조각상을 섬기며 재물신으로 숭상하며 그의 사당을 건설하기도 하였다.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범려는 월왕을 도와 오국을 멸한  관직에서 물러났다고 한다. 그렇게 북방의 제나라로 방랑하며 떠돌며 이름을 치이자피로 개명 후 황무지를 개간하여 큰 재물을 얻었다. 제나라 왕이 그를 승상으로 청하였고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재물을 백성들에게 나눠 주고는 다시 조용히 정도현으로 이동해 이름을 도주공으로 개명하였다. 그리고는 다시 박리다매와 상품 유통의 경제 원리를 이용해 부를 축척하였다. 이해 범려의 둘째 아들이 사람을 죽이고 초나라에 갇히게 되었다. 재물을 좋아하던 큰 아들이 이 일을 처리하기를 강력하게 원하였다. 범려는 탐탁치 않았으나 어쩔수 없이 동의하였다. 큰아들은 황금을 가지고 초국으로 가 일을 시키는 대로 처리한 후 돌아 오라는 말을 듣지 않고 은밀히 초국에 머무르며 몇몇의 귀족들과 왕래하였다. 

   사건을 책임자인 관원 장생은 청렴결백으로 이름나 있는 자였다. 그는 큰 아들의 황금을 받지 않고 보관한 후 그저 기회를 엿봐 초왕을 설득하여 죄인들의 사면을 청하였다. 큰 아들은 귀족들을 통해 초왕의 대사면 소식을 듣고는 장생의 역할이 크지 않다고 여겨 황금을 돌려달라고 하였다. 장생은 범려의 큰 아들에게 매수당했다 는 것을 치욕스럽게 느껴 초왕을 찾아 대로 상에서 범려의 아들이 관원에게 뇌물을 주어 초왕이 도주공의 아들을 위해 대사면을 명하였다는 소문이 있다고 하였다. 초왕은 그 즉시 명을 내려 먼저 범려의 아들을 죽이고 나서 전국적으로 대사면을 명하였다. 범려는 이 사실을 알고 난 후 그 황금을 다시 가난한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백성들은 매우 감격하여 그를 재물신으로 숭배하고 그를 위해 사원을 짓고서 제를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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