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려와 여(蠡)성
소흥 고성은 월국의 도읍으로 250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있다.재 춘추전국시대에 월나라는 와룡산, 탑산, 백마산, 구오산, 포룡산, 화주산, 토성산등의 자연의 형세를 끼고 성벽을 쌓았다. 성벽을 따라 아홉개의 수륙 성문을 건설하여 이 소흥 고성은 지키기는 쉬우며 공격하기는 어려워 구천왕 이후에 발전을 이룩하는데 결정적인 근간이 되었다. 범려의 총명함과 지혜가 이 성의 축조에 구현되었다.
월국 수도는 원래 지금의 주지시였다. 후에 기원전 491년 월왕 구천이 오왕 부차에게 패하여 인질로 잡혔다가 풀려나면서 월주(지금의 소흥)으로 도읍을 옮겼다. 구천이 월나라로 돌아온 후 치욕을 잊지 않고 수도를 옮기기로 결정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 성을 쌓는 중책을 범려에게 맡겼다. 범려는 월왕의 중대한 임무를 하명 받고 이곳 저곳을 둘러보던 끝에 회계산 북쪽 기슭 한 평원에서 발걸음을 멈추었다. 이 평지는 앞에 수로가 막혀있고 뒤에는 회계산맥이 장벽이 되어 공격은 용이하고 방비는 수월한 지형으로 도읍으로서는 최고의 선택지였다. 월왕이 이를 전해 듣고 이 곳에 성을 쌓기로 결정했다.
범려는 숙련공들을 모아 성 건축을 시작하였다. 와룡산 꼭대기에 비익루를 지어 오나라의 동태를 관찰하고, 성벽을 따라 9개의 수륙성문을 설치하였다.
월왕 구천은 주지에서 월주로 천도하여 올 때 월주의 새로 건설된 성 북서쪽 모퉁에 성벽과 성문을 쌓지 않을 것을 보고 당혹해하며 의아해 하였다. 범려는 이것은 오나라를 방심하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을 설명을 하였는데 구천은 그 말을 듣고 탄복하였다. 북서쪽 외곽에 성벽을 설치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높고 큰 석패방을 세워 “하늘을 두려워하고 나라를 보위한다.”는 글을 새겨월나라는 오나라의 천위를 두려워하며 오직 생존만을 바란다는 뜻으로 오나라를 방심하게 하였다. 오나라는 정말 그 글을 보고 속아 넘어갔고 월나라는 그 틈을 타 견고하게 발전할 수 있었다.
범려는 국가를 위해 공을 세우고 마음으로 충성을 다했으며 자신의 지혜로 국가에 보답하였기에 후세 사람들이 그를 칭송하게되었다. 범려의 이러한 공을 기리기 위해 소흥성을 범려 이름의 려(蠡)자를 따 ‘여(蠡)성’이라고 부르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