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롱의 유래
(오디오)
국롱은 소흥고성 소강교(小江桥) 북쪽에 위치한 골목이다.
소흥방직나염업의 역사는 유구하며 춘추전국시대에 월나라 도성은 갈포,
삼베 생산의 중심지였다.
명나라 때 여기에 소흥부 방직 나염국(绍兴府织染局)을 설치하여 소흥 방직 나염업을 관리하였는데,
후대 사람들은 이곳 길을 국롱이라고 불렀다.
송나라 가태(宋嘉泰) 회계지(会稽志)에 의하면, 수나라 시대 월주에 한 여인이 실뜨기 기술이 매우 뛰어났다.
그녀는 그 광택좋고 섬세하지만 무늬가 아름답지 못하고 색채도 선명하지 못하다고 느꼈다.
어느 날 밤, 꿈에서 어떤 신이 그녀에게 말했다: 우혈(禹穴)에 삼천년씩 열리고,
그곳의 호랑나비 고치가 있는데 그것으로 베를 짜서 옷을 만들면 분명 아름다운 무늬가 있을 것이다.고 하였다.
다음날 아침, 그녀는 걸어서 약예계(若耶溪)로 갔는데, 거기에 과연 많은 야생 누에고치가 있었다.
이 누에고치로 옷을 짜자 정말 꽃모양이 아름답고 능무늬가 돌출되어 빛이 났다.
그래서 사람들은 모두 이 물건은 하늘에만 있어야 하는데,
인간이 어찌 감히 이 옷을 입을 수 있겠는가라고 감탄 할 정도였다.
이것은 수·당나라 때 월주의 직조 기술이 이미 매우 선진적이었고 앞서 있었다는 것을 설명한다.
송대에 들어서면서 소흥 지역의 방직업은 더욱 전례없이 발달하였다.
거의 모든 곳에 누에가 있었고, 집안일은 방직업이었다.
관련 학자의 추산에 의하면 송나라 때 조정에 바쳐진 비단은 소흥 지역에서만 전체의 17% 정도를 차지했다고 한다.
명나라 초기에 정부가 농민들에게 면화 재배지를 열도록 장려하여 소흥은 전국의 비단,
면포 교역 중심지가 되었다. 관리를 강화하기 위해 조정은 여기에 직염국을 설치하였다.
지금 직염국은 이미 폐지되었지만, 국롱이라는 지명은 계속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지금도 사람들이 이곳을 여행할 때면 여전히 그 유구한 방직문화가 가져온 작은 집안의 벽옥같은 따뜻한 다림질을 느낄 수 있고,
수묵 화폭이 그려진 옷가지를 감상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