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성 왕희지의 이야기
왕희지(321년—379년)는 낭야(오늘의 산동린이) 출신으로서 후에 회계산음(오늘의 절강 소흥)으로 이사하였다. 동진의 저명한 서예가로서 후세에“서성”으로 추앙 받고 있으며 가장 우수한 작품은 바로 ≪난정집서(蘭亭集序)≫이다.
왕희지상
승주·왕희지묘
왕희지와 난정
영화9년(353년), 음력 3월 3일, 왕희지는 41명의 명인을 초청하여 소흥 난정에서 제례형식의 모임을 가졌다. 이날은 하늘은 맑고,공기는 청명하고, 바람은 따사롭고, 날씨는 화창하다.그리고 이곳에는 우거진 숲과 높은 대나무가 있고 맑은 시냇물이 형성되는 급류가 있다. 모두들 구불구불한 개울가에 앉아 술을 가득 담은 컵을 물우에 놓고술잔이 물을 따라 떠내려가도록 한다. 컵이 누구 앞에 세워지면 누가 술잔에 든 술을 다마시 고시를 지어 모두 술을 마시며 시를 지어 흥을 돋운다. 왕희지는 술을 마시며 즐거워할 때를 틈타 이번 모임에서 사람들이 창작한시 37수를 모아 붓을 들어“천하제일행서”로 불리는《난정집서(蘭亭集序)》을 썼다.
≪난정집서(蘭亭集序)≫
≪난정집서(蘭亭集序)≫는 서예 예술의 진귀한 보물일 뿐만 아니라 중국 산문사에서 진귀한 작품으로서 왕희지의 넓은 흉금과 적극적이고 진취적인 정신 풍모를 구현하여 높은 명성을 갖고 있다.
소흥·난팅비정
소흥난정·곡수유상
왕희지는 젊은 시절부터 벼슬을 잘하지 않고 여러 차례 관직을 사임했다. 회계내사관직을 맡은 기간에 그는 백성들의 생활 상황을 매우 이해하고 동정하였으며 백성을 위해 정무를 간소화하고 백성들의 부담을 경감할 것을 주장하였으며 소흥 민간에서는 왕희지가 노인을 돕고 어린이를 돕는다는 이야기가 많이 전해지고 있다.
경서를 쓰고 거위를 바꾼다.
소흥난정·아지
소흥난정·묵화정
어느 날 왕희지가 산질을 산책하다가 아름다운 백조들을 보았다. 이 거위의 주인은 도사였다. 왕희지가 그를 만났을 때 그는 등불 밑에서≪황정경(黃庭經)≫을 베껴 쓰고 있었다. 왕희지가 앞으로 다가가서 그에게 물었다. "내가당신을 대신해서 경문을 베껴 쓰려고 하는데 괜찮겠습니까? 당신은 나에게 거위 한 마리만 보내주시면 됩니다." 도사는 왕희지의 글씨가 잘 쓰여졌음을 알고 웃으며 말했다. "당신이 나를 도와 이≪황정경(黃庭經)≫을 베꼈으니 거위 한 마리는 말할 것도 없고 한 무리를 전부 당신께 드려도 되겠습니다." 그리하여 왕희지는 즉시 붓을 휘두르기시작하여 단번에 경문을 전부 베껴 썼다.도사는 가장 좋은 흰거위 한 마리를 골라 우리에 넣어 그에게 주었다. 때문에 ≪황정경(黃庭經)≫을 일명≪환아첩(煥鵝帖)≫이라고도 한다.
왕희지의 부채
왕희지는 회계군(오늘의 절강성 소흥)에서 태수 관직을 맡고 관직을 사임한 후 즙산(蕺山)에 살았는데 한 할머니가 10여개의 6각형의 부채를 가지고 장사를 하는 것을 보고 "이부채는얼마인가?"라고 물었다. 할머니는 "돈 20문"이라고 대답했다. 왕희지는 이 말을 듣고 갑자기 글쓰기에 흥이 나붓을 들어 부채에 다섯 글자를 썼다. 할머니는 이를 보고 다소 불쾌해하면서 조급해하며 말했다. "우리 가족은 내가 부채를 팔아 먹여 살렸는데 너는 내 부채에 글을 쓰고 내 부채를 망가뜨렸는데 내가 어떻게 팔아 먹는단말이냐?" 왕희지는 서두르지않고 말했다. "괜찮다. 다른 사람에게 부채의 글씨를 왕희지가 쓴 것이라고 말하기만하면 부채마다 100문을 팔 수 있을 거야." 할머니는 시장에 나오니 과연사람들이 앞을 다투어 부채를 사갔다. 할머니는 기뻐하셔서 또 부채를 가지고 왕희지를 청해 글씨를 쓰려고 했지만 왕희지는 웃기만 하고 승낙하지 않았다. 이이야기에서 볼 수 있듯이 왕희지의 서예는 당시에 이미 매우 인기가 있었다.
소흥·제선교(소흥시 문려산업연구원편집번역원중문웹페이지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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